[책] 파이 이야기 - 얀 마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원작 <파이 이야기>. 선박 난파에서 끝내 살아난 한 소년의 표류기를 통해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경계면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마치 기적과도 같은 극적인 생존기를 통해서 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답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 다시 작품을 감상하면 또 다른 새로운 성찰을 제공해주는 그런 명작이라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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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
작품 초반부에 동물과 동물원 그리고 동물을 바라보는 다양한 인간들의 시선과 생각들을 묘사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동물원을 통해 돈을 벌려고 하는 파이의 아버지, 동물원은 동물들에게 낙원과도 같은 곳이라 생각하는 파이, 동물을 보고 경외감을 느끼는 쿠마르 씨, 동물원의 동물들을 하나의 장난감처럼 괴롭히는 일부 관람객들 (그리고 동물원을 하나의 동물학대 시설로만 생각하는 자칭 동물 애호가들-책에선 안 나오지만). 그러한 것들을 종합해보자면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공간은 맞지만, 인간-동물 모두에게 유익한 부분이 좀 더 많은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결국 불안정한 지역정세에 따라서, 파이네 가족은 이민을 희망하며 처분하다 남은 동물들과 함께 배에 오르지만, 결국 배는 침몰하게 되고 이들의 보금자리와 삶은 산산조각 난다. 동물원의 해체 = 안전한 보금자리의 해체로 연결 지어 볼 수 있으며, 결국 동물, 인간 모두가 야생의 삶으로 던져지게 된다. 신을 숭배하고, 생물의 존엄을 지켜주던 '파이' 조차 살기 위해 야생성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모든 생물이 가진 삶에 대한 갈망과 그로 인해 일깨워지는 본능은 원초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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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기독교 그리고 인도
작품 중 '기독교인들은 성질이 급하다?' 에 대한 소년 '파이'의 짧은 생각이 나온다. 무슨 소린가 하여 천천히 들여다보니, 성경의 구절(창세기)에서도 알 수 있듯 하나님은 천지를 일주일 만에 뚝딱 창조해내셨다. 하나님을 추종하는 기독교 신자들도 그들의 신과 같이 성질이 급할 것이라 생각하고 표현한 듯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또 어떤가? 아마도 세계에서 손에 꼽을 만큼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을까? 기독교가 한국에서 이렇게 빨리 거대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있었던 요인들 중 한 가지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 죄를 용서하는 건 얼마나 빠른가, 어떠한 죄를 지어도, 예수님이 대신 벌받았으니 괜찮다고 한다. 니체의 안티 크리스트에서도 나오지만 이런 특성들이 '기독교'의 번성 요인이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상당히 재밌는 것은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 여행을 꿈꾸기도 하고, 그곳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한다는 점이다. 나도 가보지는 못했지만, 인도 특유의 과하기까지 한 여유로움 + 여행이라는 상황 + 한국사회의 빨리빨리. 이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 자신에 대해서 천천히 되돌아보며, 어떠한 깨달음을 얻기에 좋은 조건을 만들어주는 듯하다. 위험하지만 않다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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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배타주의
작품 중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세 종교인들이 함께 소년 '파이'의 종교에 대해 추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퍽이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종교는 신성하고 거룩하지만, 그 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종교에서 나름 명망 있는 수행자가 되었더라도, 각자가 속한 곳에서의 종교적 배타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과 조직이라는 것을 생각해보게 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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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이야기
마지막 장에서 생존자 '파이'는 호랑이, 하이에나, 오랑 무탄, 얼룩말 등 동물이 나오는 이야기와 요리사, 어머니, 청년 항해사가 나오는 이야기.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 다른 방식으로 서술되는 두 가지 이야기 중 어느 것이 나은지 물어본다. 인간들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보다 잔인하고, 스스로 죄책감에 빠질만한 사건들이 묘사되는 것을 보아, 어쩌면 진짜 일어난 사건을 잊고, 스스로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해 동물들이 나오는 이야기로 각색했다는 생각도 들긴 했다. 뭐 어떤 게 사실이든 뭐가 중요하겠나, 어차피 둘 다 '파이'에게는 끔찍한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살아남기 위해 했던 생각, 믿음, 행동들은 인간이 극한 상황에 쳐했을 때 어떻게까지 할 수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는 강하면서도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로 보았을 때는 정말 뛰어난 영상미에 압도당했었다. 작품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봤었기에 더욱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었다. 다만 어쩌면 그때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파이'가 살기 위해 겪었던 그 모든 것들보다 그 영상 연출에 집중하여 다른 부분을 잘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지금 이렇게 책으로 다시 보면서, '파이' 내면에서 이뤄지는 내적인 대화와 생각, 그리고 보이는 것 외의 것들까지도 그의 입장에 서서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는 경험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원작 소설이 있는 명화를 좋아한다.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해석된 작품은 내게 더 많은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매번 다른 감상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가?
"인생은 보내는 것이라 후회는 없어요.
아쉬운 건 작별인사를 할 시간이 없었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