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에세이’라는 장르를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책과의 소통 그리고 대화를 중요시하는 편이어서 ‘에세이’는 그저 지적 허영을 뽐내고자 하는 저자의 꼰대 짓 모음집으로 치부하고 있기에 큰 기대 없이 책을 펼쳤었다. 하지만 왠 걸 작품을 읽어보니 저자의 견해와 평소 내가 생각해왔던 부분들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공감을 나눌 수 있었고, 한 발 더 나아가, 내가 표현하고 싶어 했던 부분을 역사적 사료를 통해 한 층 더 세련되고 멋진 표현으로 다듬어 내었다. 평소 내가 쓰는 표현이 저잣거리의 투박한 ‘호객행위’라고 한다면, 저자의 표현은 저명한 셰프의 코스요리에 곁들여지는 ‘해설’ 같은 표현이랄까. 마음에 드는 문장을 곱씹어 보게 되는 훌륭한 작품이었고, 나 자신의 이정표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부분들도 많았기에, 그 점을 중점적으로 감상을 남기고자 한다.
*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
예술이란 내게는 엄청 머나먼 이야기인 줄 알았었다. 당연하게도 그 시절에는 어떠한 예술 작품을 봐도 아무런 감흥도, 여운도 느낄 수 없었었다. 그러다 크나큰 좌절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을 때, 불현듯 내 인생 또한 수많은 예술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후로는 스스로의 삶을 관조하며 어느 정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그때부터 예술작품들을 감상 그리고 작품과 대화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고, 내 삶을 투영함과 동시에 나만의 예술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낭만의 기원과 가치
나는 ‘낭만주의자’이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남들에게 보여주기도 민망한 수준의 감성글을 끄적여보기도 하면서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우쭐대며 티 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취지와 시작이 어떻게 되었든 지금의 나는 낭만주의를 외치고는 있다. 조금 다른 점은 자본에 잠식된 사회에서, “돈이 없으면, 낭만도 없다”라는 말을 더 이상 틀리다고만 말할 수 없게 된 듯하다. 하지만 진정한 ‘낭만’을 아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면, ‘낭만주의’의 시대는 다시 한번 올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적당한 권력에의 순응’과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자본’ 은 필요하다 라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유능제강’이라 하지 않았는가, 부드러움은 강함을 이긴다. 시대가 변한 만큼 우리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 잃어버린 고독을 찾아서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은퇴 이후의 ‘외로움’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내 입장에서는 ‘그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만, 많은 사람들이 은퇴를 하고 나서야, 벌거 벗겨진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듯하니 대략적으로 이해는 된다. 그 모든 게 자업자득이라고 생각 하지만.. 분명 은퇴까지의 많은 시간들 중 진정한 대화와 소통을 위해 손을 뻗은 많은 관계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외면하면서 선택했던 삶의 응보이니 겸허히 받아들이고 새롭게 그 자신들의 삶을 설계하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 삶은 원래 ‘고독’하다. 이를 외로움과 착각하지 말자. 타의에 의한 고독은, 자의에 의한 고독보다도 더 잔인하다..
* 지지 위 지지 부지 위 부지
“앎의 기본이 정직함이라는 사실”이라는 글귀와 대비되지만, 많은 지식인들은 자신의 지식 ‘설파’를 더 중요시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진심으로 상대에게 도움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것에 의의를 두는 듯한 느낌. 그래서 나는 소위 ‘지식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경험이 나에게 와 닿지 않을뿐더러, 그들의 ‘앎’이 나의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고 느껴지다 보니 더욱 그렇게 되는 듯하다. “널리 읽고, 스스로 의문을 품어 깊이 생각하는 자. 그리하여 자신의 견해를 명백히 밝히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자, 그러한 사람이 진정으로 아는 자이다.”라고 했는데, 만약 그 ‘아는 자’가 애초에 이해하지 못하는 불가해의 영역이라고 한다면? 의문조차 들지 않는 부분이라면? 결국 그는 소위 ‘꼰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나에게도 해당되는 문제고 우리는 그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 독서, 인간의 으뜸가는 일
나는 ‘독서’를 어느 정도 의무감으로 하는 편이다. 그래서 저자처럼 “인간의 으뜸가는 일” 로 생각하기보다는, ‘사람’ 답게 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한 개인이 직-간접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세계의 크기는 제한적이다. 하지만 독서를 통해서라면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읽는다’라는 행위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과 직접 ‘대화’ 했을 때 가능한 일이지만,,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또 그만큼 모두에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든 문제이긴 하다. 저자는 ‘취업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독서를 강요했고, 결국 그 독서가 사람들이 알아봐 주는 인재로 만들어 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만, 취업이라는 거대한 벽에 맞닿아 본 경험자로서, 일단 먹고 살고난 다음에야 다른 게 보이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 온 사람들은 애초에 어느 정도의 인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 공감한다. ‘독서’는 삶의 역경에 저항하는 ‘면역력’을 길러주는 일종의 영양제이다. 모두 지금부터라도 책을 펴서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 보수동 책방골목의 가치
어렸을 적, 아버지는 만화방을 운영하셨었다. 그 덕에 한 달에 한 번씩은 보수동 책방 골목에 꼭 가서 책을 여러 권씩 고르게 해 주셨다. 사실 그 당시 읽는 책이라고 해봐야 만화책이나 액션 북(선택지 별로 이야기가 다르게 진행되는 책), 게임잡지 등 학문적, 문학적 가치가 있다고 보기 어려운 책들이었지만, 내 독서습관 형성에 있어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보수동이 ‘네버랜드’라도 되는 양 신비롭고 경외롭게 느껴졌으나 성인이 된 후 보수동에서는 어린 시절 나의 ‘네버랜드’는 더 이상 느껴 볼 수 없었고, 실제로도 이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 거리가 좋다. 빛은 잃어도 잠시 온기를 품고 있는 ‘백열등’처럼 따뜻한, 보수동은 내게 그런 동네다. 나는 그곳이 좋다.
*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는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불안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각자의 예측 반경 안에 위치해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래 사람은 원래 불안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새로운 불안을 만들고, 해소하는 것을 반복하는 것이 인생의 ‘업’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몹시도 불안정한 우리 사회에서 ‘자유를 피하고 구속을 갈망하는 이’들을 힐난할 것이 아니라. 불안 속에서도 작은 ‘안정’을 발판 삼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불안을 이겨내고 즐기면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삶은 멋지고 아름답다. 하지만 아름답지 않다고 해서 무가치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삶은 원래 불안하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불안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 시간의 놀라운 발견
시간에 관한 많은 명언들이 있으며 또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 ‘시간은 상대적’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전혀 모르더라도 다들 이미 그것을 몸소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대다수는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듯하다. 타인에 의한 타인의 시간 활용법은 각 개인에게 있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의 ‘시간’.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시간은 상대적’이다. 빠른 시간을 사는 사람, 느린 시간을 사는 사람. 내 것이 아닌 방법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하니 자꾸 힘이 드는 것이다. 나의 ‘시간’ 은 내 방식대로, 내가 진정으로 즐겁게 활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용하면 된다. 결국 현재라는 시간의 거대한 흐름에 내 몸을 온전히 맡겨 흘러가야 하는 것이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이미 모두는 그것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다만, 커다란 욕심에 의해 스스로 진실을 보지 못하게 됐을 뿐.
* 호기심은 젊다
어린 시절 나는 꽤나 호기심이 많았던 아이였지만 소심하고 수동적이었던 성격 탓인지 질문을 하는 것이 꽤나 어려웠었다. 그러다 보니 혼자 해결하려는 성향이 강해졌고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든 찾아보는 편이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궁금한 게 많이 줄어들었지만 어느 정도 아는 게 많이 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면 알아봐야 실제로 바꿀 수 없거나 필요하다고 여겨지지 않게 되어 잘 궁금해하지 않게 된 것 같다. 확실히 '호기심은 젊다.' 권태에 찌들게 된 스스로를 반성해보며, 다시 호기심 많은 아이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 확신은 모든 소통의 적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자주 극단적인 ‘확신’을 한다. 그 결과 당연히도 대부분의 사람들과 소통이 잘 되지 않는 편이다. 처음부터 이런 성격은 아니었다. 타인과 많은 것을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내가 느끼는 것, 생각하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생각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오판이었던 것 같다. 이런저런 상처가 반복된 후에야 내 생각의 이질성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이제 내게 우수한 ‘방어 기제’로써 활용되고 있다. 이제는 나름대로 머리가 꽤나 커버렸다. 그와 동시에 나는 어마어마한 변덕쟁이가 되었기에, 나는 내가 극단적인 ‘확신’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 한다. 그렇게 믿음으로써 나는 또 한 번 대화를 시도해볼 수 있다.
서평은 종종 써왔지만, 독후감은 오랜만에 써봤다. 그래서인지 글 중간중간 서평처럼 쓴듯한 느낌이 드는 부분이 많다. 따로 저자를 폄훼하거나, '나는 달라'라고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좋은 글이었고, 나름대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이야기여서 마음의 울림을 느꼈다. 그 단상을 통해 나온 감정의 파편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하다.
확실히, 요즘 사람들은 이전에 비해 책 읽는 양도 줄었고 자극적-직관적인 미디어를 선호하는 듯하다. 시대적 변화이기도 하고, 실제로 문화적으로 다양하게 접근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이는 역시 너무 자극적이고, 단편적이라고 생각한다. '독서'가 느긋히 작품과 대화를 하는 양방향 소통창구라고 한다면 (물론 그냥 책을 읽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영상을 통해서 이 같은 과정을 수행하려 할 때, 단방향적 정보 수용의 형태로 진행되기 쉽다. 결국 생각할 시간은 부족하게 되고, 그저 주어진 정보를 수용하게만 되어버리기 쉽다. 즉, 절대적으로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아쉽고 무엇을 하든 생각을 통한 대화를 시도가 활발해졌으면 한다. 인생은 길다. 모든 것을 빨리 처리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느긋하게 유람하듯 살아가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오전을 사는 이에게 오후도 미래다." 제목의 의미에 대하여 사실 책을 읽은 후에도 잘 와 닿지는 않지만, 매 순간을 즐겁게 즐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근래에 개인적으로 스트레스를 극심히 받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괴로웠던 과거에서 좀처럼 빠져나오기 힘들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가 놓쳤던 부분들에 대해 생각을 하면서 다시 한번 정리를 할 수 있었다. 불안과 고통을 즐겁게 이겨내는 자세. 그것이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전은 끝났다. 이제 새로운 오후를 맞이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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