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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P.하루 2020. 10. 4.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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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아직도 새로운 SF의 소재가 남아있나?"라는 생각을 바로 멈추게 만들어준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과학적 고증도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공계열 전공 출신의 작가들을 선호하는 편인데, 성격이 다른 분야의 학문들이 한데 어우러져 발생하는 시너지 효과는 기존의 없던 새로움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 초엽 작가는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신예작가였고, 그녀의 작품은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케빈 방정식>을 통해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고, 더 많은 작품을 찾아보다 알게 된 이 작품은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마음을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가지 작품을 골라서 감상을 작성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한 작품을 선택하는 것이 어려워 짧게나마 조금씩 감상문을 작성해보고자 한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 대한 비유와 상징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았다. 성인식 이후 돌아오는 사람과 돌아오지 않는 사람.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라면 역시 그곳에 남아있는 것을 택할 듯하다. 비록 시련과 고통으로 인해 어려운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더욱 높지만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 사람은 성장하고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순례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미 동경과 이상향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곳이 시초지일지 마을 일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나와 다른 것을 멀리하고, 때로는 동경하고 그리워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곳에 남았고 누군가는 그곳을 떠났다. 어느 곳이 더 나은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각자 어디에 있는 우리는 '내가 있지 않은 곳'을 언제나 그리워할 것이다. 그럼에도 '시초지'가 더 값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곳에 '사랑' 이 있었고, 그로 인해 그들이 경험한 최고의 순간 때문이 아닐까?

스펙트럼

<스펙트럼>

 한 개체로서의 삶을 이어가는 '루이'들 개인이기보다는 전체로 한 흐름을 함께 흘러가듯 살아가는 이들이 참 신기하게끔 느껴졌다. 빛을 통해 소통하는 이들이 보는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웠을지 전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러한 '루이'들에게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는 '희진'은 무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반려동물과 같이 생각되었을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인류의 역사가 쓰인 방식도 '루이'들에게 '희진'이 받아들여진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타인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흡수하고 착취 해왔다는 것? 그렇기에 작품 말미에 '희진'의 판단은 확실히 옳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들 자신이 가진 스펙트럼 조차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같은 방식으로 소통하지만 소통할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언젠가는 우리가 하나의 연속된 스펙트럼으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공생 가설>

 류드밀라의 행성. 정말 어떤 작품인지 보고 싶게끔 묘사해놨다. 텍스트의 장점이자 한계이기도 한 상상력 활용. 그렇지만 내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너무 막연하게만 느껴져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인간의 '인간성'이라는 것이 인간 본성에 따른 것 이 아니라 '공생체'로부터 학습된 관념이라는 것이었다. 7세 이전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 류드밀라의 행성에 대한 그리움 등이 '공생체'로부터 기인된 것. 이러한 관점은 신선하고도 파격적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인간성'을 지니기 위해 공생체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일까? 한 발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인류는 '공생체'와의 공생 이후에야 호모 사피엔스가 될 수 있었고,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맹위를 떨치게 될 수 있었을 수도 있었다라고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뭐 어디까지나 이 또한 가설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는 때때로 선택을 강요받는다. 일과 가족(혹은 친구, 연인) 중에서 한 가지를 고르자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라고 말하고, 일을 선택당할 것이다. 가족은 항상 함께 하는 사람들이라고 착각하기 쉽기에.. 뭐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둘 다 완전히 잡아내지 못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상당한 듯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었다. 순간의 나의 선택이 우리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착각했었으니, 그 순간이 아직도 쓰리게 느껴진다.

 결국 제 때를 놓친 주인공 노인은 평생을 후회 속에서 지내면서 원하는 행성을 향해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게 된다. 끝내는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떠나버리는 그녀의 심정을 생각해보자면, 차라리 후련하지 않았을까? 삶의 목적은 각양각색이다. 또한 모든 선택은 시간에 지배 당하기 마련이다. 아쉽게도 우리가 잘못된 선택을 깨닫는 순간 그 시점은 너무나도 늦어버린 경우가 많다. 작품 내에서는 직접적인 공간으로 다가갈 수 없음을 표현했지만, 결국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빛을 곧 시간이라고 생각해본다면 이 이야기는 곧 우리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으면 한다. 물론 나부터.

 

<감정의 물성>

 물건을 통해 감정이 영향을 받게 된다는 설정. 제목을 보자마자 바로 마약이 떠오르긴 했지만, 비단 나만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실제로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모두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감정들만 구매하여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마자, '우울체'를 통해 우울함을 만끽하는 여주인공이 나오시더라. 뭐 사실 어느 정도 공감은 한다. 감정의 본질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느 정도의 부적 감정이 있어야 양적인 감정이 더 빛을 발하는. '우울체'를 통해 만들어진 기분을 극복할 때의 그 행복감은 어쩌면 그냥 '행복체'를 만졌을 때 느끼는 것보다 클 것이다.

 감정의 물성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흩어져 다른 형태로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감정의 근원이 무엇인지 망각한 채, 사람에 의해, 환경에 의해, 그것에 지배당하기도 한다. 어쩌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의 결과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 '감정의 물성'을 원하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나쁜 결과를 피하기 위해 가장 중요하면서도 필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마음이라고 나는 생각해본다. 

 

<관내 분실>

 사자의 생존 기억을 데이터화 하여 '도서관'이라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여 만나볼 수 있는 세상. 그 데이터를 생전의 인물로 생각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뭐 그런 건 어쨌든 상관없는 것 같다. 그 사람으로부터 지친 현재의 나 자신이 위로받을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 기억들이 스스로 지성을 갖춰 축적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기억이 발달하게 된다면, 그게 더 무서울 것 같다. 과연 그 존재를 원래 내가 아는 그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져보게 되었다.

작품을 다 읽고, 가족애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였다. 나로 인해 부모님들이 포기해야 했던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보며 괜히 죄스런 마음이 들기도 하여 지금부터라도 그 은혜에 대해서 갚아나가야 한다는 다짐을 해보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사회적 환경으로 인해(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점 혹은 지금도) 여성들이 출산 및 육아로 인해 자신의 일을 포기해야 하는 것은 충분히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택한 그 결과를 바꿀 수 있는 상황과 여유가 생긴 시점에도 그때의 포기로 인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더욱이 그 선택에 대한 짐을 자식에게 떠 넘기면서까지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러한 문제는 이제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작중 '은하'는 분명 다시 시작해볼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 탓'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주체적인 인물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또 한편으로 이러한 인물과 상황을 어렵지 않게 현실에서 접해볼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남았지만, 여러 생각들을 해보게 해 주어 좋았다. (물론 애초에 이러한 상황이 생긴 사회 자체에 더 문제가 있음에는 동의한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운명의 날 '재경'은 우주가 아닌 바다로 뛰어든다. 우주보다 바다를 택한 그 이유를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우주'를 인류의 외연 확장에 대한 욕망의 목적지로 생각을 해봤을 때, 짧은 생을 살아가는 한 인간에게 그 시간들이 과연 유익하기만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대한 우주 속에서 외롭게 견뎌야 할 시간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어쩌면 그 사실이 못내 두려웠을 수도 있다. 반면 '바다'는 적어도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면서 정말로 원한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원래 알던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우주와 바다' 모두 인류가 정복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이다. 어차피 유사한 미지의 세계라면, 리스크가 비교적 적은 바다가 더 정복할만한 이점을 가졌기에, '재경'은 바다로 뛰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전체 작품들에 골고루 펼쳐져 있는 정서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차별받는 순례자들, 인디언 같은 루이, 고향을 잃은 공생체, 슬렌포니아로 떠난 노인, 우울체를 즐긴 보현, 분실된 은하, 우주비행사였던 재경 등 모두 현실사회로 적용해보면, 소외받고 차별받는 약자에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는 각자가 가진 특징으로 인해 어떤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기보다는, 그냥 남들과 조금 다를 뿐 그러한 특징이 문제가 된다거나, 갈등의 이유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이야기들은 가상의 인물들을 빌어, 현실의 약자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와도 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현실은 혹독하고 냉정하지만, 언젠가 세상이 좀 더 나아져,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날들이 왔으면 한다.

 '사이언스-픽션' 이 아닌 '논-픽션'으로 말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진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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